1. 이름 값으로 팔아먹으려는 영화
무라카미 하루키, 이창동. 투자자들은 이 두 이름만으로도 손익분기점은 쉽게 넘길 거라 생각했나보다. 손익분기점이 250만명이라 들었는데, 지금 약 50만 정도 들어간 것 같다. 영화든 책이든 이름값으로 장사하려는 건 일단 조심할 필요가 있다.
2. 과도한 알바질
칸에서 평론가들이 극찬했다면서 황금종려상 노려볼만하다는 설레발 기사들이 우르르 뜰 때 느낌이 왔다. 네이버/다음 영화 섹션에서는 알바들이 평점 별풍선을 쏟아붓고 있고, 인터넷 게시판을 가보면 알바가 쓴 게 티나는 호평 관람기가 여럿 올라온다.
황금종려상이고 감독상이고 하나도 못 받고 나니까, 칸이 예술영화는 등한시하고 가족영화에 비중을 두었다느니, 심사위원이 여성 위주라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가 수상했다느니 별별 말이 다 나온다. 월드컵 때 강팀이랑 붙기 전에 설레발치다가 지고 나서는 온갖 이유를 다 들이대는 거랑 똑같은 패턴이다. 언제는 칸이 예술영화 위주로 가서 한국영화가 상을 못받는다 하지 않았나?
3. 과도한 의미 부여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이 대부분 그렇듯이 꿈보다 해몽이다. 원작인 '헛간을 태우다'를 읽어보진 않았으나, 대략 스토리는 들었다. 이걸 2시간 30분짜리 영화로 만들 깜이나 되는 거였나? 쓸모없어진 비닐을 태운다는 게, 벤이 잠시 데리고 놀다가 흥미를 읽어버린 여자를 죽이는 행위의 메타포란 게 그렇게 대단한 이야기인가? 흥밋거리로 간단하게 읽을 짧은 이야기일 뿐인데, 시대의 의미를 어깨에 짊어진 영화처럼 의미 부여하는 게 과하다.
젊은이들의 시대적 아픔 어쩌고... 진짜 그런 게 영화에서 표현되었나? 종수가 벤에게 열등감을 느꼈고, 해미는 아프리카 갔다와서는 돈 많은 벤의 일회용 여친이 되었기 때문에? 너무 얄팍하다. 그걸로 젊은이들의 시대적 아픔이 표현되었다고 생각한다면 이창동 감독이 이 시대를 잘 모르는 것이지. 이 이야기는 2010년대 젊은이들의 아픔을 묘사한 게 아니라, 어떤 시대를 배경으로 해도 보편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가난한 청년이 부자집 아들에게 느끼는 열등감과 경쟁심을 묘사한 것이다. 2010년대 젊은이들의 시대적 아픔이란 건, 돈 많은 백수 벤에 대해 느끼는 열등감이 아니라는 걸 이창동 감독은 잘 모르는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와 이창동 감독이 젊었을 때 느꼈던 동종의 감정을 곱씹어본 것에 불과하다.
김승옥의 '무진기행'보다 훨씬 못한 이야기 아닌가?
4. 유아인 ...
영화 안 봐도 눈앞에 선한 유아인의 연기. 영화 자체가 원작 소설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한 것이라, 필요없이 힘주는 유아인의 연기는 영화의 과도함에 대한 디스로 읽힐 수는 있겠으나 그의 연기는 그런 의도가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물론 애호박으로 사람을 때리는 게 재미있는 농담이라고 주장하는 과도한 자의식도 마음에 안 들고, 그 이후 사건 전개도 매우 마음에 안 들어서 그의 연기는 다시 보고 싶지 않기도 하다.
5. 맥락없는 노출씬
영화를 안 봤지만 노출씬이 나오는 장면에 대한 설명은 읽어서 안다. 누구는 그 노출씬이 매우 중요하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노출을 하지 않고도 해미의 감정을 묘사하고 종수와 벤 사이의 긴장감을 표출할 수 있는 연출은 여럿 있었을 것이다. 그걸 굳이 ...
전종서라는 무명의 신인 여배우니까 가능했을 거라고 충분히 짐작 가능하다.
전종서라는 무명의 신인 여배우니까 가능했을 거라고 충분히 짐작 가능하다.
6. 하루키의 유효기간
상실의 시대, 노르웨이의 숲 같은 소설이 나왔을 때가 20년도 더 된 때인데, 그 때 그의 소설은 센세이셔널 했다. 하지만 그런 콩깍지는 금방 벗겨졌다. 그 이후 나는 한 동안 하루키는 읽지 않았다. 재작년에 다자키 쓰쿠루를 읽었는데, 참 여전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가 재즈에 대해서 쓴 에세이는 좋았는데, 소설은 식상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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