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주간 세상과 동떨어져 지냈다. 여기서 세상이란 내가 일과 시간에 의사소통하고 문서를 주고받으며 갑론을박하던 사람들을 말한다.
그 기간 동안 나는 '세상'에 섞여있기보다는, 나를 아는 사람이라곤 아내 밖에 없고 영화에서 볼 법한 소리차단 유리로 둘러싸인 신생아실에 누워있는 아기들을 들락날락하면서 매번 보게 되는 산후조리원이라는 공간에서 살았다. 산후조리원도 '세상'과 크게 다르지 않는 공간이라 조금의 적응기를 거친 산모들이 식당과 수유실에서 대화하면서 또 하나의 세상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나는 다른 아기 아빠들과 비슷하게 외딴 섬이어서 대면 대화는 아내와만 나누었고 가끔 방문하시는 친가와 처가의 어른들과 대화할 뿐이었다.
아빠가 되었다는 것을 실감한 것은 아이가 태어난 순간을 목격하면서가 아니다. 자기 배에서 아이가 태어나서 꼬물거리는 것을 목격하는 엄마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엄마임을 자각하겠지만, 아이와 직접적인 교감을 가질 수 없는 아빠는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이 낯설고 자기와는 상관없는 일처럼 느껴진다. 아빠는 아이가 태어나면서부터 수행해야 하는 아빠로서의 미션을 하나씩 클리어 하면서 늘어나는 책임감과 함께 아빠로서의 자각을 가진다. 예를 들어, 신생아 집중관리센터에 입원해있는 아기를 매일 두번 면회 간다든지(아내는 산후조리를 해야 해서 면회를 갈 수가 없었다), 팩에 담긴 모유를 면회시에 전달한다든지, 간호사들 몰래 아이의 동영상을 찍어와서 아내와 친지들에게 보여준다든지 하는 일들 말이다.
아이가 조금 일찍 태어났기 때문에 그 동안 차일피일 미뤄왔던 이름 짓기도 완료해야 했다. 친지들의 의견은 분분하지만, 우리 부부는 오늘 아이 이름을 결정했다. 이름짓기에 대해서는 나도 나름의 원칙을 갖고 있다. 세글자 이하로 할 것(서비스의 이름을 지을 때 국한. 사람의 이름은 당연히 두 글자 혹은 세 글자이겠지만), 가급적 받침이 없는 음소를 이용할 것, 발음이 용이할 것(받침이 없을 것과 비슷한 원칙), 영어 표기가 쉬우며 다양한 표기가 어려울 것(no ambiguation), 괜찮은 영어 이름과 매칭될 것, 이름 자체로 나쁜 의미가 없어야 하며, 성과 이름을 붙여서 부를 때도 나쁜 의미가 전달되지 않을 것, 좋은 의미가 있으면 좋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이름도 좋음. 한 가지 덧붙이자면, 이건 원칙이라기보다는 자연스런 본성인데, 아이의 이름에 부모의 희망이 들어가 있을 것. 아이의 미래에 대한 부모의 욕심을 투영하라고 이름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크게 그릇된 작명의 원칙은 아니라고 본다.
우리 아이의 이름을 짓고 보니, 내가 지금까지 지어준 이름이 세 개였다. 하나는 서비스의 이름, 둘째는 건물의 이름,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 아이의 이름이다. 결과적으로 다들 괜찮은 이름이었다고 나 스스로 평가한다.
아이가 어떤 사람이 되었으면 하느냐는 질문에 대해 나는 항상 아이가 창의적인 사람이고 창의력을 발휘하는 일을 했으면 한다고 답해왔다. 예술가이거나 창업가(entrepreneur)이거나 과학자 등등. 경제적으로는 풍요롭지 못하더라도 한 번의 인생을 사는 것이라면 가장 재미있을 직업들이 아닐까 싶다. 인공지능이 발달해서 인간이 하는 것이 더 나은 일이 점점 줄어드는 디스토피아에서 아이가 살게 된다면, 창의적인 직업을 가지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가 될 수도 있다. 그런 시대에도 아이가 행복하게 살 수 있기를 바란다.
아이에게 이런 욕심을 투영해놓고서 정작 아빠인 나 자신의 삶은 그렇지 못했음을 두고, 혹자는 자신의 못 이룬 꿈을 아이에게 대리실현하려는 것이 아니냐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렇진 않다. 나는 다시 태어나도 역시 비슷하게 살지 않을까 싶다. 애초에 공대를 안 가고 다른 전공을 선택해서 지금과 비슷한 삶을 좀더 일찍 살지 않았을까 한다. 그렇다고 내가 지금의 삶에 만족한다는 것은 아니다. 내가 원하는 것과 내가 잘하는 것이 일치하지는 않는 부조화의 삶을 살게 될 것 같다는 자가진단이다.
마찬가지로 아이도 아빠나 혹은 스스로가 원하는 것과 잘하는 것이 일치하지 않는 삶을 살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건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아이가 선택해서 살아가야 할 몫이다.
아이를 보고 있으면서 이상한 경험을 하게 된다. 아이가 배냇짓을 하거나 칭얼대거나 울거나 웃거나 하는 걸 보고 있으면 온몸이 찌릿해진다. 이건 아이가 나한테 보내는 텔레파시인가? 나는 다른 사람을 보면서 온몸이 찌릿해지는 경험을 한 적이 별로 없다. 기억이 잘 안 난다. 그런데 아이는 보고 있을 때마다 찌릿해지니, 이거 감전되는 경험인가? 벌써 팔불출이 되었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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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기간 동안 나는 '세상'에 섞여있기보다는, 나를 아는 사람이라곤 아내 밖에 없고 영화에서 볼 법한 소리차단 유리로 둘러싸인 신생아실에 누워있는 아기들을 들락날락하면서 매번 보게 되는 산후조리원이라는 공간에서 살았다. 산후조리원도 '세상'과 크게 다르지 않는 공간이라 조금의 적응기를 거친 산모들이 식당과 수유실에서 대화하면서 또 하나의 세상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나는 다른 아기 아빠들과 비슷하게 외딴 섬이어서 대면 대화는 아내와만 나누었고 가끔 방문하시는 친가와 처가의 어른들과 대화할 뿐이었다.
아빠가 되었다는 것을 실감한 것은 아이가 태어난 순간을 목격하면서가 아니다. 자기 배에서 아이가 태어나서 꼬물거리는 것을 목격하는 엄마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엄마임을 자각하겠지만, 아이와 직접적인 교감을 가질 수 없는 아빠는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이 낯설고 자기와는 상관없는 일처럼 느껴진다. 아빠는 아이가 태어나면서부터 수행해야 하는 아빠로서의 미션을 하나씩 클리어 하면서 늘어나는 책임감과 함께 아빠로서의 자각을 가진다. 예를 들어, 신생아 집중관리센터에 입원해있는 아기를 매일 두번 면회 간다든지(아내는 산후조리를 해야 해서 면회를 갈 수가 없었다), 팩에 담긴 모유를 면회시에 전달한다든지, 간호사들 몰래 아이의 동영상을 찍어와서 아내와 친지들에게 보여준다든지 하는 일들 말이다.
아이가 조금 일찍 태어났기 때문에 그 동안 차일피일 미뤄왔던 이름 짓기도 완료해야 했다. 친지들의 의견은 분분하지만, 우리 부부는 오늘 아이 이름을 결정했다. 이름짓기에 대해서는 나도 나름의 원칙을 갖고 있다. 세글자 이하로 할 것(서비스의 이름을 지을 때 국한. 사람의 이름은 당연히 두 글자 혹은 세 글자이겠지만), 가급적 받침이 없는 음소를 이용할 것, 발음이 용이할 것(받침이 없을 것과 비슷한 원칙), 영어 표기가 쉬우며 다양한 표기가 어려울 것(no ambiguation), 괜찮은 영어 이름과 매칭될 것, 이름 자체로 나쁜 의미가 없어야 하며, 성과 이름을 붙여서 부를 때도 나쁜 의미가 전달되지 않을 것, 좋은 의미가 있으면 좋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이름도 좋음. 한 가지 덧붙이자면, 이건 원칙이라기보다는 자연스런 본성인데, 아이의 이름에 부모의 희망이 들어가 있을 것. 아이의 미래에 대한 부모의 욕심을 투영하라고 이름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크게 그릇된 작명의 원칙은 아니라고 본다.
우리 아이의 이름을 짓고 보니, 내가 지금까지 지어준 이름이 세 개였다. 하나는 서비스의 이름, 둘째는 건물의 이름,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 아이의 이름이다. 결과적으로 다들 괜찮은 이름이었다고 나 스스로 평가한다.
아이가 어떤 사람이 되었으면 하느냐는 질문에 대해 나는 항상 아이가 창의적인 사람이고 창의력을 발휘하는 일을 했으면 한다고 답해왔다. 예술가이거나 창업가(entrepreneur)이거나 과학자 등등. 경제적으로는 풍요롭지 못하더라도 한 번의 인생을 사는 것이라면 가장 재미있을 직업들이 아닐까 싶다. 인공지능이 발달해서 인간이 하는 것이 더 나은 일이 점점 줄어드는 디스토피아에서 아이가 살게 된다면, 창의적인 직업을 가지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가 될 수도 있다. 그런 시대에도 아이가 행복하게 살 수 있기를 바란다.
아이에게 이런 욕심을 투영해놓고서 정작 아빠인 나 자신의 삶은 그렇지 못했음을 두고, 혹자는 자신의 못 이룬 꿈을 아이에게 대리실현하려는 것이 아니냐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렇진 않다. 나는 다시 태어나도 역시 비슷하게 살지 않을까 싶다. 애초에 공대를 안 가고 다른 전공을 선택해서 지금과 비슷한 삶을 좀더 일찍 살지 않았을까 한다. 그렇다고 내가 지금의 삶에 만족한다는 것은 아니다. 내가 원하는 것과 내가 잘하는 것이 일치하지는 않는 부조화의 삶을 살게 될 것 같다는 자가진단이다.
마찬가지로 아이도 아빠나 혹은 스스로가 원하는 것과 잘하는 것이 일치하지 않는 삶을 살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건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아이가 선택해서 살아가야 할 몫이다.
아이를 보고 있으면서 이상한 경험을 하게 된다. 아이가 배냇짓을 하거나 칭얼대거나 울거나 웃거나 하는 걸 보고 있으면 온몸이 찌릿해진다. 이건 아이가 나한테 보내는 텔레파시인가? 나는 다른 사람을 보면서 온몸이 찌릿해지는 경험을 한 적이 별로 없다. 기억이 잘 안 난다. 그런데 아이는 보고 있을 때마다 찌릿해지니, 이거 감전되는 경험인가? 벌써 팔불출이 되었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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